어제-종강과 이별의 싱숭생숭함(휘발성이 강하단 걸 알지만서도)
오늘 아침과 낮-빈틈없는 말하기 시험과 정신적 고통인 성적 입력 그리고 잡다한 일들
을 끝내고 나니 오늘 2시 반.. 아무리 내가 방학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오늘 정규반 종강이고 다음 주 월요일 휴일이고 날씨 좋은 낮인데 뭐라도 하고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 남편은.. 반차 내!!! 라고 하고 싶지만 반차는커녕 오늘 저녁에 회식이라고 하니 오랜만에 혼자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무거운 가방을 두고 가오리 티셔츠와 고무줄바지와 맨발에 샌들로 환복하고 일단 1차 행선지를 정했다. 홍대 근처여서 사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면 뭐 끽해야 40분 안 걸리는 거리였겠지만 오늘은 노는 날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로 다 채워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1) 버스 타고 멀리 가기 - 창문 밖을 내다보며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좋은 노래들을 들으며 좀 졸기도 하면서 엉덩이가 아플 때까지 버스를 탔다. 앤더슨 팍으로 시작해서 무작위로 팝을 막 들었는데 그중에서는 Johnny Balik이라는 가수의 Honey라는 곡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구먼. 그리고 톰 미쉬를 몇 번 이름만 들어 본 것 같은데 플레이리스트에 몇 곡 껴 있어서 들어볼 기회가 있어서 좋았다. 서울역에서 한 번 환승해서 우리 집에서 서교동까지 1시간 반쯤 걸렸다. 정말 간만에 아무 생각 안 하고 멍하니 버스에 실려 가서 너무 좋았다.
(2) 이찌멘 나가사끼 짬뽕 - 옛날에 신촌역에 있을 때 종종 가서 먹고는 했는데 없어져서 좀 섭섭했는데 알고 보니 서교동으로 옮겨서 계속 영업을 하고 있었다. 여기를 내 1차 행선지로 정하고 5시쯤 도착해서 평범하게 맛있게 좀 추억을 되살리며 먹었다. 보통 나의 픽은 순한 맛-유부초밥-단무지-칼슘 추가인데 다음에는 후리가케 공기밥으로 해야겠다. 그리고 반숙 달걀 추가가 생겨서 별 대단한 맛은 아니었지만 좋았다. 난 달걀이 좋아!

(3) 책 읽기와 아이스 라떼 - 밥을 다 먹고 북카페에 가서 재밌는 책을 읽고 싶었는데 이찌멘 옆에 만화카페가 있어서 순간 혹했지만 만화카페는 남편이랑 같이 가서 책 많이 쌓아 놓고 뒹굴거리면서 읽고 나 빨리 읽는다고 남편이 감탄하고 이런 맛이라서 혼자 가고 싶진 않더라구. 첫 번째 찾은 북카페가 6시 마감이라 못 들어가고 두 번째 북 카페는 음악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무엇보다도 아이스라떼가 맛있어서 좋았는데(정말 오랜만에 아이스라떼 마셨는데 진짜 맛있었음) 결정적으로 내 취향에 맞는 책이 전-혀 없었다.. 차이나머니/스타트업생존기/트렌드코리아 뭐 이런 류의 책이나 길고양이로 태어났더라면/조금은 무심해도 괜찮아 이런 류의 책이어서 정말이지 내가 읽고 싶은 책이 한 권도 없었다. 북카페라기에는 좀 아쉬웠고 똑같은 책이 열 권씩 있고 다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얼마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자기신뢰>라는 책을 밀리의서재에서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읽은 버전은: 랄프 왈도 에머슨, <자기신뢰의 힘>, 타커스) 근데 정말 생각보다도 더 좋아서 엄청 밑줄 치면서 한 시간 동안 집중해서 읽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이랄지 자기확신을 잘 가질 수 없어 고민인 나에게 와 닿는 내용이 많았다. 사실 뒷부분은 사실 자연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라 그렇게 감흥은 없었고..ㅎㅎ 내가 밑줄 친 구절 중 특히 맘에 드는 건 이 부분들이다.
-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자신이 진실이라 여기는 것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진실이라고 생각하리라 믿는 것. 이것이야말로 비범한 재능이다.
- 나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확신을 얻거나 동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자신에 대해 어떤 부차적인 증명도 할 필요가 없다.
- 우리는 홀로 설 수 있고, 홀로 서야만 한다.
-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시해버린다. 그러다가 스스로 무시해버렸던 신의 생각을 천재들의 작품에서 발견한다. 자신의 생각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위엄을 안고 우리에게 되돌아 온 것이다.
-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자신 말고 아무도 알 수 없다. 스스로 시도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 내 방 창문 밑에 핀 장미는 이전에 피었던 장미에 대해서, 자신보다 아름다운 장미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신과 더불어 오늘을 산다. 그러므로 장미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다만 장미가 있을 뿐이다. 존재의 어떤 순간에도 장미는 완전하다.
- 하루하루가 아무 보람도 없이 흘러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혜나 시, 미덕 같은 것들을 언제, 어디서 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들은 달력에 있는 어느 특정한 날에 터득한 것이 아니다. 헤르메스가 달의 여신과 주사위 놀이를 해서 이긴 덕분에 오시리스가 태어났듯, 우리가 모르는 어느 멋진 날이 달력 어딘가에 끼워져 있다.
- 삶은 철학적인 것도, 비평적인 것도 아니다. 오로지 강인한 것이다.

(4) 음악 들으며 많이 걷기 -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맛있는 아이스 라떼를 마시며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나오니 기분이 좋고 저녁 공기도 선선해서 좀 걷고 싶었다. 그 카페가 홍대와 합정 사이였는데 우선 합정역까지 걸어가 보니 너무 금방 끝나는 느낌이라 조금 멀기는 해도 당산역까지 걸어가 보기로 생각을 했다. 사실 조금 멀어서 오히려 좋았고 양화대교를 걸어서 건너는 것도 어쩐지 조금 기대가 되는 느낌이기도 하고. 스페이스카우보이가 프로듀싱하고 너무나 자기 마음에 든다고 했던 어떤 새로 나온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서 양화대교를 걸어서 건너 보았다. 사실 노래는 전반적으로 그냥 그랬는데 오히려 그렇게 좀 그저그런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롭게 들으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시간에 쫓겨서 언제나 효율적으로 제일 좋고 제일 내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즐겨야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서 좋았다) 차가 많고 보행로가 좁고 비에 불어난 한강물이 흐렸지만 노을 지는 하늘이 아름다워서 그것도 좋았다. 내 산책은 고요한 사색은 아니고 항상 유튜브 뮤직과 아이폰 카메라가 함께 하는 산책이다. 튀빙엔에서 산책을 참 많이 하면서 사진도 아주 많이 찍었는데 당연히 튀빙엔의 아름다운 자연의 느낌은 아니었지만 대교 위에서 차와 건물과 한강 아래로 지는 노을을 보는 것도 좋고 그때 생각이 나기도 했다. 나의 산책의 마무리가 당산역으로 가는 구름다리인 것도 좋았다. 헉헉거리며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서 풍경을 구경하며 구름다리를 건너니 당산역이 나왔다.


(5) 미야베 미유키 소설 - 사실 북카페에 갈 때 미야베 미유키 소설이 있으려나, 뭔가 재미있는 걸 읽고 싶은데 통 찾기가 어려우니 역시 에도시대물에서 현대물로 넘어가야 하나, 현대물이 있으면 읽어야지.. 라는 야심찬 기대를 하며 갔는데 전혀 아니어서 좀 실망했었다. (그 덕분에 다른 좋은 책을 읽었지만) 그래서 집에 가는 길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잠깐 들러 보니 미야베 월드 제2막 책이 잔뜩 있었다. 그런데 역시 살 생각은 안 드는 걸 보니 - 코로나 시대라 중고책이 살짝 저어되기도 했지만 - 미야베 미유키 소설은 너무 재미있으면서 두 번 세 번 읽을 생각은 잘 안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일회용 소설이라는 게 아니라 처음 읽을 때의 그 짜릿함, 재미, 놀람과 감탄이 아무래도 두 번째부터는 확 반감이 되어 그런 듯. 해서, 집에 가다가 충동적으로 용꿈꾸는작은도서관에 들어갔다. 평일에는 10시까지 여는 용꿈꾸는작은도서관 만세! 여러 차례 이름을 들어보기도 했고 표지가 엄청나게 낡아 있어서 신뢰가 갔던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을 빌렸고, 또 '기담'이라는 키워드에 끌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기담집>도 빌렸다. 하루키 책을 읽으려고 빌리는 게 왠지 모르게 약간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왜 그랬던 건지 모르겠네. 오늘 내일은 이걸 읽으며 놀아야겠다. 아참! 내가 정식 출간되기도 전에 득달같이 신청해서 제일 처음 읽었던 <인내상자>...!!!!! 오늘 보니 상호대차 중인 데다가 예약이 3명이나 걸려 있어서 정말 웃기지만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재밌고 인기있는 책... 내가 발굴해서 내가 제일 먼저 읽었다 하하! 이런 느낌이었달까. 기타기타 다음 편이랑 미시마야 다음 편도 내가 매의 눈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낚아채듯 신청해야겠다. 신청한 사람이 대출 우선권이 있거든. 중복 신청이 되면 두 번째 신청은 캔슬된다고 하니 후다닥 신속하게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하루를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 행복하고 재미있게 보내고 집에 와서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한 시간쯤 일 처리를 하고 남편과 같이 거실에서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며 시간을 보내는 지금도 좋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어요. 삶의 중간중간에 이런 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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