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식의 나라 한국에서는 나도 꽤 요리를 잘하는 듯이 살 수 있었다. 비비고 된장찌개에 두부만 썰어넣어도 그럴싸했고 쓱배송으로 잡채 밀키트를 시키면 하다못해 마지막에 넣는 참기름 몇 방울까지도 소포장되어서 집앞에 와 있었으니까. 그러나 여긴... 여긴 다르다. 한식 간편식 같은 건 당연히 없고 ‘안 되면 사먹어’도 이래저래 쉽지가 않은 사정이니. 그리하여 2016년에도 난 짬뽕이니 김말이니 고추장찌개니 만들었다가 항상 망한 역사가 있었는데 역시나... 이제 또 요리 망하기의 역사가 시작된 듯하다...
그러니까 발단은 어제 저녁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수제비를 만들어 볼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실제로 수제비는 여기 있는 교환학생들조차도 많이 만들어 먹는다. 식재료도 다 여기에서 구할 수 있고(+한국보다 훨씬 싸고) 뜨뜻~하니 맛있자뉴. 그래서 나도 쉽게 보고 집 앞 penny에서 밀가루, 달걀, 감자, 후추를 야심차게 구매한 것이다... 마침 나에게는 한국에서 가져온 <다시다 시원국물>도 있었기에 육수 걱정없이 감자 깎고 반죽 만들어서 때려넣으면 되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이버에서 레시피를 검색했는데.. 일단 4인 가족 레시피를 1/4한 것이 1인 레시피라고 생각한 것이 나의 수많은 패착 중 첫 번째 패착이었고 반죽이라는 것이 어떤 성질을 지니는지 몰랐던 게 두 번째 패착, 그리하여 달걀에 물까지 넣어버려 찐득찐득한 반죽에 밀가루를 넣고 또 푸석푸석해진 거 같으면 물 넣고, 밀가루 넣고, 그렇게 반복한 게 세 번째 패착, 반죽에 간을 해야 한다길래 소금을 때려부은 게 네 번째 패착, 무엇보다도 커다래진 반죽을 가눌 길이 없어 뇨끼 스타일로 두툼하게 반죽을 뚝뚝 뜯어 던진 게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패착이었다... 냄비가 끓어 넘치고 물이 쫄아서 더 큰 냄비에 수제비(가 되고 싶었던 그 무언가)를 옮겨 붓고 한 시간^^을 끓여도... 네... 뇨끼 스타일 수제비(가 되고 싶었던 그 무언가)는 익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곰탕을 끓여도 진작 한 그릇 먹었겠다 싶었을 때쯤 감자만 건져먹고 수제비(가 되고 싶었던 그 무언가)는 폐기하였다. 그렇게 나의 첫 수제비는 가고....
오늘 아침에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아빠의 (비)웃음 소리와 함께 초간단 1인 레시피가 넘어왔다. 밀가루 쪼끔, 찐득찐득해지니까 물은 진짜 쪼끔, 달걀도 소금도 혼자 먹을 땐 다 필요없고... 젓가락으로 살살 섞다가 손으로 반죽해서 얇게 떼어서 넣기. 오늘도 패착은 좀 있었지만 어제에 비하면 그것은 패착도 아니여. 속이 영원히 익지 않는 수제비(가 되고 싶었던 그 무언가)에 트라우마 생겨서 넓은 접시에 반죽을 거의 펴바르다시피 얇게 밀어놓고 떼 넣었다... 수제비가 이렇게 빠르게 되는 음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근데 오늘은 <다시다 얼큰국물>을 사용하고 집에 채소가 아무것도 없어서 달걀만 풀어 넣었는데.. 다 먹고 나니 이건 라면과 본질적으로 같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 조미료 국물, 달걀, 그리고 밀가루. 후아 다음엔 감자 호박 양파도 넣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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